제목 8월4일 우당 이회영 선생 기념관에 가다!! 등록일 2019-03-08
작성자 관리자 조회수 2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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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은 우당 이회영 선생 기념관으로 견학을 갔다.

  우선 우당 이회영 선생 하면 떠오르는 것이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본보기로 기억되는 독립운동가 이다.

  우당 선생은 대한제국의 교육가, 사상가 이자  일제 강점기의 독립운동가다

   교편을 잡다가 신민회의 창립 멤버가 되었고,  만주에 서전서숙을 설립 하였으며, 일가 6 형제와 함께 재산을

   처분하고 만주로 망명하여 신흥무관학교를 설립, 독립군 양성과 군자금 모금 활동을 했다.

   그 뒤 신흥무관학교가 일제의 탄압으로 실패하자 상하이에서 국내,외 단체와 연합하여 독립운동을 하다가 

   1932년 11월 상하이 항구에서 한인 교포들의 밀고로 체포되어 고문 후유증으로 돌아가셔서 결국 해방된 조국을 못 보셨다..

   선조때 영의정을 지낸 백사 이항복의 10대 손이며 대한민국 초대 부통령을 지낸 이시형의 형이다.

 

* 을사늑약이 강제로 체결되자 우당 선생은 1907년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리는 만국평화회의에 밀사를 파견해 을사늑약의

  부당함과 강압성을 세계에 폭로 하려는 계획을 세워 고종에게 건의하자 고종 께서는 받아들여 헤이그로 밀사를 보내지만

  일본의 조선통감부 경찰에 적발 되면서 고종 퇴위의 빌미를 제공하게 된다.

  이로인해 우당 선생은 형제들을 소집해 본인은 조국을 위해 보탬이 되고자 고종황제에게 허락을 받고 행한 일이지만

  고종이 강제 퇴위하게 되자 집안의 재산을 처분해(당시 600만원 - 명동 성당 일대 부동산) 독립운동을 하고자 형제들에게

   의견을 물으니 모두가 함께 하기로 해서 모든 식솔들을 데리고 머나먼 이국땅 만주로 향한다.

  그곳에서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해 무료로 3,500여명의 독립군을 양성 한다.   

   그러나 가족들은  하루에 한끼 식사 밖에 못해 일부는 병사하고 일부는 굶어죽는 상황이 발생한다.

   결국 6 형제중 동생인 이시형(대한민국 초대 부통령)만 조국의 해방을 보게 된다...

   명문가 자손으로서 삶을 버리고 오직 조국 독립을 위해 평생 모든것을 바친 우당 이회영 선생,

   숭고한 정신을 우리 모두가  오래도록 기억 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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