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정도전집터, 신흥대학교 터, 보성사 터, 우정총국외 (5월 28일) 등록일 2023-06-13
작성자 관리자 조회수 76
첨부파일

1685430077872.jpg

 

1685430078122.jpg

 

1685430078278.jpg

 

1685430078408.jpg

 

1685430078514.jpg

 

1685430078612.jpg

 

1685430086114.jpg

 

1685430085777.jpg

 

1685430085869.jpg

 

1685430086248.jpg

 

 

금일 봉사는 전날부터 비가 계속 내려 당일 아침 날씨상황에 따라 단장님과 상의한 끝에 진행하기로 했다.

보슬비가 계속 내리고 있어 먼저 사무실에서 삼봉 정도전에 대해 이야기 하면서 바깥 날씨를 체크해 봤더니

우산쓰고 다닐수 있다고 판단해 예정된 일정대로 한국문화유산진흥원 사무실을 나섰다.

 

오늘의 봉사 일정은 정도전집터, 신흥대학교터, 보성사터, 우정총국, 충정공 민영환 자결터다.

비오는데도 불구하고 봉사에 참석한 친구들은 다양했다.

  중국에서 유학온 대학생, 서울대 봉사 동아리 , 대구에서 여행온 일가족 (3명- 엄마, 두형제) 등 기타 학생들과

 학부형님이  " 조선건국에서 조선말 을사늑약" 까지 우중 봉사라는 소중한 시간을 함께 했다.

 

* 삼봉 정도전 - 고려말 학자로써 태조 이성계와 함께 고려의 부폐된 조국을 개혁 하고자 새로운 나라를

    건국 하는데  모든것을  기획하고 디자인한 조선의 개국공신이며 정치가다.

    고려말 여러 관직을 거치면서 성균관에서는 포은 정몽주와 학생들에게 성리학을 가르치기도 했다.

    고려말 개혁에 있어서 정도전은 개혁 후 새로운 나라를, 정몽주는 개혁은 하되 나라는  고려로 하면서 

    서로가 다른길을 걷게 되면서 공교롭게도 정몽주는 고려시대에  이방원에 의해 죽음을 맞고, 

   정도전 또한  조선 건국 후 1398년 이방원에게 죽음을 맞이 하게 되는데, 정도전은 " 임금과 신하가 조화롭게 

   다스리는 나라" 를 주장했고, 이방원은 "  강력한 왕권 중심의 나라" 를 표방 하면서 새로운 나라는 건국 했지만

   함께 같이 갈수 없는 길로 들어서고 말았던 것입니다. 결국 정도전은  본인이 원하는 원대한 나라를 만들지도    

   못하고 떠났다.

 

* 신흥대학교 터 - 일제 강점기 시기에 중국 서간도에서 독립군 양성을 했던 신흥무관학교의 전신인 학교터다.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하기 위해 독립운동가인 백사 이항복의 후에인 우당 이회영과 여섯 형제, 석주 이상룡 선생이

    모든 재산을 정리해 중국 서간도로 건너가 학교를 세우고  독립군을 양성해 크나큰 전과를 올렸다.     

   이곳에서 졸업한 학생은 3,500여명이 되었고, 무장 항일 투쟁의 초석이 되었고 의열단 단장으로 널리 알려진 김원봉도

   신흥무관학교 출신이다. 

   우당 이회영 가문은 당시 명예, 부귀영화도 버리고 모든 재산을 처분하고 오직 나라를 찾겠다는 일념 하나로 모든 식솔을

   데리고 간도로 건너가 독립군 양성에 매진 하지만 여섯 형제와 식구들은  굶어 죽는 상황에 처 하기도 했다.

   우당 이회영 가문과 석주 이상용 (영남의 명문가)선생이  한국판 노블리스 오블리제 (가진자의 도덕적 의무)의

   선두 주자가 아닌가 생각해 보는 시간 이었다.      

 

* 보성사 터 - 3.1 운동때 독립선언서를 인쇄한 곳이다.

  천도교 계통의 인쇄소로써 옥파 이종일 사장은 천도교 교주인 손병희의 특명으로 육당 최남선이 초안을 집필하고

  민족대표 33인이 서명한 독립선언서를 넘겨받아  일본경찰의  눈을 피해 천도교인의 자금을 지원받아  1919년 2월27일 

 인쇄가 마무리 되어,  3.1 운동때 만천하에 조선은 자주독립국임을  선포 하고 3.1운동의 시발점이 됐다. 

 

* 우정총국 - 우리나라 최초의; 우체국이다. 1884년 11월 18일  우편사업 시작!!!

    우체국장인 홍영식이 미국으로 사찰단으로  다녀온 후 우리나라도 우체국의 필요성을 느끼고 고종에개 건의해  

    만들어졌다.

   그러나 개화파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은 홍영식에게 외국 사찰을 통해 근대화에 이른 외국  문물은 받아 

   드리고 우리도 변해야 한다고 하면서 새로운 나라를 꿈꾸게 됨니다. 

   젊은 개화파들은 현재 조선의 수구파와 청나라군을 몰아내고 새로운 나라를 만들기 위해 일본에게 도움을 청 합니다.

   그리고 정변 일정을 우정총국 개국 축하연인 1884년 12월 4일로 잡고, 모든 준비를 하고 오후 7시경에 이 장소에서

   수구파를 몰아내고 정권을 잡지만 3일 천하로 끝나고 맙니다. 

   첫째는 백성을 등에업고 거사를 치러야 되는데 젊은 지식인들 위주로 했고, 준비기간이 너무 짧고 성급하고, , 또한 일본은

   도와  주기로 했지만 잘못하다간  청군과 마찰이 생길것을 우려해 포기 하면서  갑신정변은 실패하게 됨니다. 

   물론 실패는 했지만 젊은 개화파 청년들이 조선말의 잘못된 방향을 바라보고 죽음도 마다하지 않고 시도를 했다는 것에

   역사학자들은 큰 의미를 부여 합니다. 

   

* 민영환 자결 터 - 충정공 민영환은 호조판서를 지낸 민겸호의 아들이자 명성황후의 조카로 문과에 급제한 후 병조판서,

   호조판서 등을 지냈으며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2세의  대관식에 참여하기 위해  일본,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등 장장

   6개월 에  걸처  세계 여러나라의 발전된  모습을 보면서 우리나라도  언젠가는 발전된 모습을 보여 주고자 했다고 합니다.

   러시아파로써 귀국 후 독립협회를 후원 하기도 했지만, 친일파들에 밀려 한직으로 밀려났고, 1905년 일본에 의해  강제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을사오적의 처형과 조약의 파기를 상소 하였지만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이에 그해 11월 결국 죽음으로 항거해 국민을 각성하게 할 것을 결심하고 고종황제와 국민, 각국의  외교관 앞으로 유서를

   남기고 집에서 자결 하였다. 민영환 선생의 자결은 당시 사회에 커다란 충격을 주었고, 그 뒤 많은 순국지사들이 그를 따라

   자결 하였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