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4월 9일 "안동별궁 터, 조선어학회터외 등록일 2023-04-18
작성자 관리자 조회수 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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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코로나 이후로 2번째로 봉사하는 날이다.

날씨가 많이 풀려 20명의 학생, 성인, 학부형님이 함께했다.

한국문화유산진흥원 사무실에서 만나 노성란 단장님의 간단한 소개와 함께,

충훈부터 - 안동별궁터 - 조선어학회 터 - 성삼문 집터, 김옥균집 터 - 인왕제색도(겸재정선)

의 코스를 표지석 환경정리와 역사적 사실과 배경을  공유하는  소중한 시간을 함께했다.

 

* 충훈부터는 당시 국가에 공을 세운 분들을 관리하고 상을 내여주는 관청.

 

* 안동별궁터 : 세종대왕이 막내아들 영응대군 집으로  건축했고, 또한 이곳에서 승하하신

장소이기도 하다.  세종대왕아 승하 하신지 5일만에 문종의 즉위식도 열렸고, 이후 대군들이

게속 사용하다가 조선 마지막 황제 순종의 가례식이 이곳에서 행 해지기도 했다.

그러나 1910년 경술국치 이후 조선총독부 재산이 되었으나, 1937년 민영휘가 불하받아

처음에는 본인의 이름 끝자를 써서 경성휘문소학교를 세웠다가, 후에 아내 안유풍의 이름

끝자를 이용해 1945년 풍문여학교를 개교해 2017년까지 이곳에 있다가 서울시가 매입해

공예박물관으로 만들고, 풍문여고는 강남으로 이전 하였다.  

 

* 조선어학회는  말모이 영화로도 개봉 되었다.

1921년 주시경선생의 제자들이 한글의 연구와 발전을 목적으로 발족한 조선어 연구회의 

후신이다.  1942년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활동이 중단 되었다가 광복 후 한글학회로 이어졌다.

조선어학회는 나라를 잃기 2년전인 1908년 8월31일 서울 봉원사에서

"말과 글은 홀로 서는 나라됨의 특별한 빛" 이라며 "그 빛을 밝히자"는 주시경을 중심으로 

국어연구학회를 창립한 것이 그 시초가 되었다.

조선어학회는 일제의 숱한 억압과 탄압속에서도 우리나라 언어를 지켜왔다는 데에

큰 의의를 둘수있고, 사전편찬은 조선민족정신을 유지하는 민족운동의 형태라고 볼수 있다. 

중심인물 - 이극로, 이윤재,  최현배, 장지영외

 

* 성삼문 집터 : 계유정난 1453년 조선 6대왕 단종을 삼촌인  수양대군이 반정으로 몰아내고 왕으로 추대.

세종대왕의 유지에 따라

 어린 단종을 보필하던 황보인, 김종서를 제거하고 수양대군이 모든 권력을 지배하자, 성삼문과 뜻을 같이하던

사람들은 단종을 보위에 다시 올리고자 수양대군을 제거하기 위해 계획을 수립 하던중 동료인 김질의 

밀고로 함께 주동했던 5명과 함께 고문 끝에 죽음을 맞이해서 이를 사육신이라고 훗날 부르게 된다.

이일로 인해 가족은 멸족을 당했는데, 아버자,형제등 남자는 모조리 살해당해 혈손이 끊기고,

성삼문의 아내와 딸은 사노 및 관노가 되었고 재산은 몰수 되었다.

수양대군은 집현전 학자들을 포섭하기 위해 정인지, 신숙주, 박팽년등 집현전 학사 36명과 함께 

성삼문을 집현전 관원으로으로서 공이 있다고 하여 축하연을 베풀었으나 성삼문은 수치로 여기고

혼자만이 연회를 베푸는데 참여하지 않는다.

성삼문은 국새는 수양대군에게 있지만 주상(단종)이 아직 살아 계시고, 우리가 있으니 복위를 도모 하다가

실패하면   그때 죽어도 늦지 않다며 단종 복위운동을 결심 했지만 실패하고 만다.

성삼문은 수양대군의 집권과 권력 장악에 이르는 과정에서 특별 배려로 다른 학사들과 함께 등용되고, 

수양대군의 자문 역할로서 배려를 받았지만 세종대왕의 유지와 수양대군의 왕권 강화정책에 부정적이었다.

** 사육신 : 성삼문, 박팽년, 이개 , 하위지, 유성원, 유응부     *** 영화 - 관상

 

* 김옥균 집터 - 갑신정변(1884) 의  주역중 1명) 

충남 공주 태생으로 장남이지만 7살 어린 나이에 당숙인 김병기에 입양되어 한양으로 올라와 생활하게 된다.

유년시절 양부인 김병기가 강릉부사에 임명되자 강릉에 위치한 율곡사당에서 율곡 학풍의 영향을 받으며

자라났다고 한다.  어린 시절부터 학문과 문장, 시 그림, 글쓰기 음악등 다양한 분야에 소질을 발휘한 그는

1870년 즈음부터 18세기 개화사상가 환재 박규수의 사랑방에서 개화사상을 배우면서 성장한다.  

1872년 알성문과에 급제하여 홍문관 교리로 임명되어 개화당 형성에 진력하여 동지를 모으고 지도자가 됨니다.

일본의 근대화 실태를 알가 위해 일본에 건너가 정치가들과 접촉하고 정치적 동향등을 상세히 알아 보는중에 

조선에서는 임오군란(1882)이 일어나 황급히 귀국합니다.

김옥균은 일본이 서구화 되는것을 보고 조선이 프랑스처럼 자주 부강한 근대국가가 되기를 소망 했다고 합니다.

이를 위해 신분제도의 폐지, 신분에 구애받지 않은 인재등용, 국가재정 개혁, 철도 부설과 기선 해운의 도입, 

전신에 의거한 통신발전, 인구조사등을 주장 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은 청나라의 극심한 방해를 받게 되는데, 당시 임오군란의 진압을 위해 청나라는 3천여명

의 군대를 조선에 파견하여 흥선대원군을 납치하고 임오군란을 진압합니다.

하지만 임오군란이 종결된 후에도 군대를 철수하지 않고 조선을 실질적으로 지배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간섭을

하는데, 당연히 청나라의 입장에서는 자주 근대화정책을 펼친 김옥균이 눈엣 가시처럼 미운 존재가 됨니다.

민씨 세력에게 박해를 받은 김옥균은 수신사 박영효의 고문이 되어 또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나라에 닥쳐올 위기를

타계 하겠다는 생각으로 개화정책을 서두르기 시작합니다.    

 그가 서두를 수록 수구파와 정치적 갈등은 첨예해 졌고, 위로 부터의 대개혁을 단행 하고자 박영효, 홍영식, 서재필, 

서광범과 함께 일본의 도움을 받아 "갑신정변" 을 계획하게 됨니다.

1884년 개화당 동지들과 정변을 일으키기로 결정하고 우정국 준공 축하연에서 갑신정변을 일으켜, 수구파의 거물 

대신들을 처단하고 개화당의 신 정부를 수립합니다.

그러나 민씨 세력은 청나라의 위안스카이에게  구원을 요청해 군대 약 1,500명은 무력으로 궁궐에 침입하여 갑신정변을

붕괴 시키고 조선 군대는 청나라 군대에 저항하다 패배하고 맘니다.

도와주기 약속을 한 일본은 청나라와 직접적으로 부딪치면 곤란해 질것을 우려해  약속을 파기합니다.

이로인해 갑신정변은 3일 천하로 끝나게 되고 김옥균은 일본으로 망명을 합니다.

그러나 일본 정부는 망명한 김옥균을 박해 하였고, 귀양을 보내게 되는데 또 다시 김옥균은 상해로 망명했으나

수구파가 보낸 자객 홍종우에게 상해애서 암살을 당 합니다.

 

학자들은 실패원인을 일부 관료들과 지식인들의 주도로 일어난 거사이며 민중들의 폭 넓은 지지를 얻지 못한데에 

있다고 애기하고 있습니다.

비록 3일 천하로 끝났지만 갑신정변을 통해 나라의 근대화를 꿈꾸고 실행에 옮겼다는 점은 오래오래 기억할 만한 

사건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 인왕제색도 (겸재정선 76세 에 완성) 정독도서관 내

조선시대 화가 3재중에 한분인  겸재정선을 진경산수화 대가라고 말 합니다.

우리가 보통 산수화라고 애기들을 많이 하는데 겸재의 진경산수화가 나오기 전까지는 중국화풍의 모방에 추상적,

이야기를 통해  산에 대해서 그림을 그렸는데, 겸재는 우리 삼천리에도 멋진 산이 많은데 중국풍의 산수화를 모방 해서는

안 된다는  인식을 갖고, 직접 산을 찾아가 다양한 각도에서  보고 그림을 그려낸것이 진경산수화라고  합니다

인왕제색도는 인왕산에 비가 그친 후의 절경을 위에서 본것과 아래에서 본것을 참고해서 그렸다고 합니다.  

 

오늘 소공재 역사 봉사코스에서 만난 우리 선조들의 당시 생각과 환경 , 국제정세 , 지혜를  반면교사로 삼고 소공재 회원과

가족들의  활기찬 하루하루가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4월26일 (일) 일요일에  건강한 모습으로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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