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3.1운동 100주년 되는 날 상하이 독립유적지를 다녀와서 등록일 2019-03-08
작성자 관리자 조회수 631

31일 새벽 단잠을 깨우는 알람소리에 일어났지만 아침 8시까지 인천공항에 도착해야하는 발걸음은 경쾌하고 설레이기만 했다. 3.1운동 및 정부수립 100주년이 되는 기해년 31일 한국문화유산진흥원 안두순원장님과 소공재 노성란 단장님을 비롯하여 소공재에서 오랫동안 인연을 맺어오신 후원회원님들과 함께 상하이 독립유적지를 돌아보는 특별한 여행이 시작되기 때문이었다.

  

소공재 송훈배 총무이사께서는 100년전 만세시위가 벌어졌던 북촌일대에서 70여명의 학생들을 이끌고 봉사를 하여야 하는 바쁜 일정임에도 공항까지 나와 배웅을 해주었다. 예정된 시각에 정상적으로 이륙한 아시아나 항공기는 인천공항을 이륙하여 2시간만에 상하이 푸동공항에 도착했다.

  

중국정부의 최대 정치행사인 양회(兩會)가 열리는데다 하노이에서 있었던 북미 정상회담을위해 김정은위원장이 열차로 중국을 거쳐가는 상황때문인지 입국심사가 예전과 달리 까다롭게 느껴졌지만 큰 문제는 없었다. 입국장에 나오니 현지 가이드 문철남씨가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 일행 8명에 모녀 및 부부 한쌍 4분이 더하여져 총 12명이 함께 여행을 하게 되었다. 푸동 공항을 빠져 나오니 100년전 3.1운동 당시 한국인들의 아픔을 알고나 있다는듯이 눈물같은 비가 촉촉이 내리고 있었다.

  

가이드의 안내로 곧장 상하이시 황푸구 마당로에 위치한 대한민국 임시정부청사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청사는 마당로 길가에 위치해 마당로 청사혹은 보경리 건물의 4호가 청사로 쓰여 보경리 청사라고 불린다고 한다.

  

평소에도 많은 사람들이 찾는다는 마당로 청사는 3.1절 연휴를 맞아서인지 들어가는 입구부터 많은 관객으로 붐비고 있었다. 마당로 청사는 임시정부의 첫 청사가 아니고 유일한 청사도 아니라고 한다. 1932년 윤봉길 의거 이후 항저우로 피신하기까지 임시정부는 마당로 청사를 임시정부 청사중 최장 기간인 6년간 사용 했다는 이유로 임시정부의 유일한 상징으로 남아있다는 것이다.

  

마당로 청사에서 백범 김구는 세 가지 일을 했다. 하와이, 쿠바 등지의 사탕수수밭 노동자로 일하던 한인들에게 폭탄 살 돈을 보내달라는 편지를 쓰고 백범 일기를 쓰면서 독립운동사를 상세하게 기록했다. 가장 중요한 일은 함께 죽을 사람을 구하는 일이었는데 그렇게 만난 분이 이봉창의사와 윤봉길의사였다.

  

독립유적지 관련 자료를 미리 준비하여주신 안두순원장님의 덕택에 상하이에 있는 독립유적지를 아는데도 많은 도움이 될 수 있었다. 대한민국 국호가 처음 탄생한 자리는 지금은 서금2(瑞金二路)로 지명이 바뀐 상하이 김신부로(金神父路)라고 하지만 팩키지 여행일정에 쫓긴 우리는 아쉽게도 찾아볼 수 있는 시간이 없었다.

  

마당리 청사에서 신천지로 나오면서 발견한 ‘GREY HOUND’ 상호 붙은 곳이 백범 김구주석 일가가 머물렀던 자리였다는 것도 사전 공부를 하지 않았더라면 그냥 지나쳤을 것이다. 상하이 내 한국인 교포들의 자녀 교육을 담당했던 인성학교도 빼놓을 수 없는 유적지로 꼽히지만 지금은 ‘SOHO’라는 대형건물이 들어서 흔적조차 가늠할 수 없게 되었다는데 시내일정을 마치고 야간에 나오면서 건물의 옥상에 ‘SOHO’ 커다란 글자가 눈에 띄었을때는 또 다른 느낌이 일어나기도 했다.

  

인성학교는 1920년대 50-70명의 인원을 유지했지만 윤봉길 의거 이후 일제의 집요한 탄압으로 1935년 폐교가 되면서 이 자리에 새로운 건물이 들어서 지금은 흔적조차 알아볼 수 없는 처지가 되었다니 아쉬울 뿐이었다. 마당리 청사도 관광지로 변한 신천지 개발 당시 청사가 없어질뻔 하였지만 구()단위의 문물보호 단위로 지정되며 명맥을 유지하게 되었다고 한다.

  

비록 해외에 있는 유물이나 건물일지라도 우리의 역사문화와 관련된 깊은 사연이 있거나 소중한 물건이라면 정부와 온 국민이 합심하여 지속적인 관심을 기울이면서 보호하거나 반환받는데 노력을 아끼지 않아야 할 것이다. 한 번 훼손되거나 사라진 문화재는 원형을 복구하기도 또한 다시 찾아내기도 힘들다. 비록 가치가 떨어진다는 문화재일지라도 제 자리에서 본래의 모습대로 유지하는 것이 최상의 방법이 아닌가!

  

팩키지 여행은 일정에 따라 움직이지 않으면 안되는 여행이다. 그렇지만 독립유적지를 찾아온 상하이인데 큰 의미가 있는 윤봉길의사가 거사를 이룬 홍커우(홍구) 공원이 일정에 빠져 있었다. 홍커우 공원은 중국의 정신적 지주인 소설가 루쉰의 묘가 1956년 이장된 후 루쉰공원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2000년대 초반 상하이 방문 필수코스였다던 루쉰공원 입구 도로가 지금은 정차금지 구역이라 관광버스를 세울 수 없고 주변에 관광지가 없어 여행사들이 굳이 오지 않는다고 한다. 이해타산을 따지는 여행사의 무관심을 벗어나 민족 자존심을 생각하여서라도 상하이 임시정부청사를 방문하는 한국인이라면 한 두 번은 생각해볼 일이다.

  

안두순 원장님의 뜻깊은 홍커우공원 방문 제안에 함께한 여행객 4분이 혼쾌히 동의하여 일정을 조정하면서 공원내 윤봉길 의사 생애사적 전시관을 참배할 수 있었다. 전시관에서 만나뵌 윤봉길 의사의 흉상과 함께 옆에 걸려있는 사진을 보고는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가슴이 뭉클해지고 뜨거워지기도 했다. 비록 일제에 의해 눈이 가려졌지만 총살 직전임에도 가슴을 활짝편 윤봉길 의사의 당당한 모습에서 대한민국 국민 모두가 나라사랑을 제일 먼저 이루라는 마음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안두순 원장님의 제안에 윤봉길의사 흉상 앞에서 잠시 묵념의 시간을 갖고 노성란 단장님께서 준비해간 태극기를 들고 대한민국 만세가 외쳐지기도 했다. 태극기가 휘날릴때는 25세의 불꽃같은 짧은 생이었지만 영원한 삶을 누리고 계신 윤봉길 의사께서도 광복된 대한민국의 무궁한 발전을 응원하고 계실 것이라고 믿어지기도 했다.

  

윤봉길 의거는 독립에 대한 전망이 불투명한 상태에서 국내외 독립운동가들에게 광복에 대한 확고한 자신감을 심어주었을뿐만 아니라 중국인들이 희열을 느끼게 된 사건이 되었다. 윤봉길 의거전 중국인들은 한국인을 일본의 앞잡이로 여기는 분위기가 팽배하였지만 이후 조선을 항일 동지로 생각하게 되었다고 한다. 중국 총통 장제스(장개석)는 중국 백만대군도 하지 못한 일을 일개 조선청년이 해냈다면서 극찬하고 의거 이후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전폭적으로 지원하였다고 한다.

  

윤봉길 의사는 1932429일 일제의 상하이사변 전승 기념행사와 일왕의 생일축하 기념행사를 하기위해 모인 단상에 물통폭탄을 던진 것이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도시락 폭탄은 자결용이었으나 물통 폭탄 투척후 일본군의 제지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고 한다. 거사 얼마전인 19321월 일왕 히로희토에게 수류탄을 투척하고 사형당한 이봉창 의거로 위기의식을 느꼈던 일제는 당일 행사참석자들에게 도시락, 물통과 일장기만 가지고 갈 수 있도록 하였다. 행사장에 들고갈 수 있는 물건이 3개밖에 안되었지만 철통같은 검문검색이 이루어졌을 것이다. 죽음을 눈앞에 두고도 의연하게 이를 통과하시었을 윤봉길 의사를 생각하다보니 존경심을 넘어서 저절로 경외심이 생기기도 했다.

  

하나뿐인 소중한 목숨을 자신의 이익이 아닌 국가와 민족을 위해 초개처럼 내던져 버릴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죽음을 눈앞에 두고서도 의연하게 대처하며 단상을 향해 달려갔을 윤봉길 의사의 몸과 마음으로 그 당시 상황으로 잠시 돌아가보니 숙연해질 뿐이었다. 홍커우 공원안의 가득 피어있던 수 많은 홍매화 꽃들은 윤봉길 의사의 핏빛으로 물들어진 꽃이란 생각이 들기도 했다.

  

상하이 마당리 청사와 윤봉길 의사의 홍커우 공원을 둘러보면서 느낀 감회가 아직도 가슴속에서 뜨거워지는 듯 하다. 망국이라고 하지만 너무도 초라하게 느껴진 15평도 안되는 집무실과 회의실에서 나라를 걱정하시는 백범 김구 주석과 국무위원들 모습을 상상하면서 청사내부를 둘러볼때의 느낌이란! 역사공부를 통해 알고 있었지만 직접 눈으로 보고 느낀 우국지사들의 충정어린 모습에서 후손들인 우리가 나아갈 길이 무엇인지 알려주는 것 같았다. 망국의 한이어린 조국과 민족을 위해 죽음도 마다하지않았던 김구 주석과 윤봉길 의사의 말씀들을 잠시 되새겨 보고자 한다.

  

윤군 후일 지하에서 만납시다...”

  

이 시계는 선생님 말씀대로 6원을 주고 산 시계인데 선생님 시계는 2원짜리니 제 것 하고 바꿉시다. 제 시계는 앞으로 한 시간밖에 쓸 데가 없으니까요.”

  

丈夫出家生不還(장부출가생불환): 장부가 뜻을 품고 나가니 뜻을 이루지 않고는 살아 돌아오지 않는다

  

너희도 만일 피가 있고 뼈가 있다면 반드시 조선을 위해 용감한 투사가 되어라. 태극 깃발을 높이 드날리고 나의 빈 무덤 앞에 찾아와 한 잔의 술을 부어 놓아라. 그리고 너희들은 아비 없음을 슬퍼하지 말아라...”

  

이미 죽음을 각오했고 이에 이르러 하등 말할 것이 없다.”

  

백문불여일견이라고 백번 들어보는 것 보다 한 번 보는 것이 낫다는 말처럼 직접 가보고 체험해보는 것이 무척 중요하다. 이번 여행은 다른 여행과 달리 독립의 중요성과 민족의 자긍심을 체험하게 해준 소중한 여행이 되었다. 비록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지 못하였지만 자신의 목숨을 초개같이 던지고도 잘 알려지지 않은 수 많은 애국지사들 또한 우리 후손들이 보다 깊이 찾아내고 알아내어 정신적인 지주로 삼으려는 노력을 잃지 말아야 할 것이다.

  

15년전 상하이를 방문했을 때와 비교를 해보니 2008년 베이징 올림픽후 중국 국민들의 의식수준이 많이 올라가기도 하고 어느 사이에 G2로 성장한 중국의 발전해가는 모습이 놀랍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우리 역시 1988년 서울올림픽을 깃점으로 경제발전뿐만 아니라 국민의식수준이 한 단계 올라가고 고속도로 휴게소의 화장실 문화가 마치 호텔처럼 깨끗하게 정착된 것이 자랑스러운 일이 되었다.

  

볼거리, 먹거리, 즐길거리, 느낄거리가 풍부한 중국이다. 상하이를 잠시 벗어나 아름다운 도시로 소문난 항주를 방문하여 여독을 푸는 시간을 갖기도 했다. 좋은 분들을 만나 함께 동행하면서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 또한 좋았다. 소공재 후원회 양재명 부회장님과는 아침 일어나기가 부담스러울 정도로 늦은 시각까지 대화가 계속 되기도 했다. 여행에 동참하지 못한 열성적인 소공재 회원님들과 후원회 회원님들 모두가 함께 갔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느껴지기도 했다. 천안에서 올라오셨다는 모녀분과 중국여행을 자주 다녔지만 우리일행과 함께한 이번 여행이 무척 좋았다는 부부의 말이 기억이 남아 있는 것처럼 다시 되돌아가고 싶은 여행이 되었다.

  

소공재에서 오랫동안 함께 일하면서 지내와서인지 한 가족같은 분위기도 빛을 발했다. 눈빛만 보아도 원하는 것을 알았다는 듯이 말하지 않고도 서로를 배려하며 각자의 역할을 찾아 손발이 척척 맞게 행동한 회원분들의 아낌없는 봉사정신으로 여행이 더욱 즐겁기만 하고 마무리가 잘 되었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었다. 34일간 여행 기간중 계속 내리던 비가 상하이를 떠나기 전날 오후에 그치면서 반가운 햇볕도 보고 아무 탈없이 귀국하게 된것도 감사하기만 했다.

  

여행을 통해서 사람들은 힐링을 하고 많은 것을 보고 느낀다. 이번 여행은 본래의 즐거움에 더해 3.1운동 100주년 되는 날에 독립유적지를 찾아가는 뜻깊은 여행이 되었다. 열정적인 소공재 후원회 회원님들과 동행하면서 보다 깊은 유대관계를 형성할 수 있었던 것은 덤이었다. 3개월전 다른 것 생각할 필요없이 미리 좌석을 확보하지 않았더라면 의미있는 31일 출발하지 못했을 것이라는 노성란 단장님의 과감한 결정과 안두순원장님의 초대에 진심으로 감사하고 고마운 생각이 들었다. 중국에 일이 생겨 상하이에 오셨다가 바쁜 일정중에도 우리 일행을 위해 좋은 음식과 아름다운 경관으로 안내해 주시겠다며 시간을 내어주신 이규태교수님께도 감사를 드린다.

  

끝으로 소공재의 무한한 발전을 기원하며 상하이 독립운동 사적지 탐방여행에서 많은 것을 느끼게 해주고 일행을 잘 이끌어주신 안두순원장님을 비롯하여 소공재 노성란단장님, 소공재 후원회 양재명부회장님, 김정화총무님과 후원회 활동에 적극 참여하시는 김민희님, 정혜경님, 박혜성님 등 한 분 한 분 소중한 분들이 항상 건승하시기를 바라면서 여행을 통해 느낀 소감을 마치고자 한다.

 

                                                                                                                                                한국문화유산진흥원 후원회 감사 정 일 수

 

FD8A1227.JPG

 

FD8A1212.JPG

 

FD8A1215.JPG

 

FD8A1228.JPG

 

FD8A1765.JPG

 

FD8A1766.JPG

 

FD8A1770.JPG

 

FD8A1785.JPG

 

FD8A1811[1].jpg

 

FD8A1828.JPG

 

FD8A1845[1].jpg

 

FD8A1776.JPG